1588년(선조 21)∼1671년(현종 12). 조선 중기 문신. 호는 돈헌(遯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이다.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부친 괴산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과 모친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장징(張徵)의 딸 옥구장씨(沃溝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 성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44년(인조 22) 성현찰방(省峴察訪)에발령을 받았으나 모친상으로 인해 직무를 내놓고 물러갔다.
60세 이후 향인(鄕人)들에 의해 도훈장(都訓長)‧산장(山長: 서원 책임자)에 추천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사후인 1770년(영조 46)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저서로 1890년(고종 27)에 간행된 『돈헌집(遯軒集)』 4권 2책이 있다.
■ 둔헌집(遯軒集)
●형태서지
권수제
둔헌선생집(遯軒先生集)
판심제
둔헌선생문집(遯軒先生文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90년 간행
권책
4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8×15.7(cm)
어미
上下三葉花紋魚尾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도서번호
K4-5921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23
●저자
성명
이홍유(李弘有)
생년
1588년(선조 21)
몰년
1671년(현종 12)
자
우길(祐吉) , 순길(順吉)
호
둔헌(遯軒), 산민(山民)
본관
경주(慶州)
특기사항
김집(金集)의 문인. 신지익(申之益), 홍석기(洪錫箕) 등과 교유
기사전거 : 李得胤行狀(李弘有 撰), 李得胤墓碣銘(李景奭撰, 白軒集 卷46), 慶州李氏大宗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1
1월 4일, 淸州의 壽樂村에서 태어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13
부친이 西溪 가에 玩易齋를 짓다.
선조
-
~
~
萬曆
-
~
愼獨齋 金集에게 나아가 수학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17
義城 縣令인 부친을 배알하고 이듬해까지 그곳에서 독서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18
長鬐鄭氏 鄭霫의 딸과 혼인하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21
부친이 玉華洞에 지은 歲寒亭에서 독서하다. ○ 장남 李萬憲이 태어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27
3월, 華陽洞會에 참여하여 송시열에게 시를 받다. ○ 8월, 漢城試에 합격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28
2월, 進士試에 합격하다.
광해군
13
1621
신유
天啓
1
34
2월, 壽樂에서 申之益과 함께 李爾瞻의 죄를 논척하는 상소를 기초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1
次子 李萬濟가 태어나다. ○ 7월, 〈冶溪八景〉을 짓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3
5월, 부친상을 당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45
9월, 李子升ㆍ韓卓爾ㆍ李德厚 등과 槐山의 落影山을 유람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46
3월, 童蒙敎官이 되고 다시 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6월, 삼남 李萬彪가 태어나다.
저자의 手草本은 집안에서 「山民拙吟」으로 전해졌는데, 저자가졸한 뒤 자손들이 흩어져 저자의 文籍으로는 약간의 시문만이 남아 있었다. 본집이 年譜와 文 13편을 제외하면 거의 詩로 구성된 기형적인 형식을 갖춘 것도 저자 사후 유고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집안 사정에연유한다.
본집의 序, 跋 및 말미에 붙은 “庚寅仲春紫陽開刊校正監印匡榮”이란 간기를 보면, 저자의 8대손 李匡榮이 族兄李舜榮에게 간행을 의논한 뒤 초본을 淨寫 編次하고 校正과 監印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으로 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본서의 간행 과정에 조력한 李斗榮과 李舜榮도 모두 같은 항렬의 집안사람들이며, 紫陽齋는청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0년紫陽齋에서 4권 2책을 활자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장서각(K4- 5921) 등에 소장되어있다. 본서의 저본은 8대손 李匡榮이 1890년에 紫陽齋에서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장서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金洛鉉 撰), 跋(李匡榮撰), 年譜 등에 의함
제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4권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卷首에 金洛鉉이 1890년에지은 序와 목록이 있다. 권1은 年譜,文(9)이다. 연보는 저자와 부친 李得胤의 행력을섞어서 서술하였다.
〈上巡營辭免都訓長書〉는 1648년에 都訓長을사양하는 글로 5차례에 걸쳐 올렸다. 〈祭養一堂文〉은 친구 申之益에 대한 제문이고, 〈養一堂旌孝通文〉은 申鋏과 신지익의효성을 정표해달라고 지은 통문이다. 〈追遠堂記〉는부친이 선영에 追遠堂을 건립하자 저자와 맏아들 李萬憲이 공동으로 지은 기문이다.
권2는 文(3),칠언절구(4제), 칠언율시(50제)이다. 부친 李得胤에대한 行狀은 易學과 詩文에 뛰어났던 부친의 행력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辭山長書〉는 1655년 鄕士大夫들에 의해 山長에 추대되었을 때 이를 사임하는 내용이다.
〈申龍崖先生補修冊中語〉는 신지익의 손자 龍崖 申應泰가 쓴 글로, 조부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저자에게행장을 부탁해 받아두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술회한 글이다. 〈上監司書〉는 1644년 省峴道 察訪으로 부임한 지 5개월 뒤에 覲親을 겸하여 선영에제사하기를 관찰사에게 청한 上書이다.
詩는 문에 비해 다양하고 詩體別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여행지에서 읊은 것과 輓詩 및 차운시 등이 섞여 있고, 저작 연대도 뒤섞여 있어서 다소 산만하다. 칠언절구는 모두 1628년경에 친구 신지익에게 써 준 것이다. 〈奉呈養一堂主人〉과 〈冶溪八詠〉은연작시로 두 사람의 돈독한 교의를 느낄 수 있고, 저자의 서정적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
권3~4는 오언절구(23제), 오언율시(36제), 칠언절구(361제)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교유한 인물 중에서 洪錫箕와 수창한 시가 가장 많아 교유가 깊었음을 알수 있다는 것과 연작시가 많다는 것이다. 〈草堂四時詞〉, 〈山居四時〉등 생활 주변의 풍광을 읊은 연작시는 물론, 〈題瀟湘八景畫屛又寫八詠〉과 같은 題畫詩, 〈鳳凰臺八景〉, 〈敬次樂愚堂主人九曲韻〉, 〈遮川八景〉, 〈晩對軒十六景〉 등 여행지에서의 감회를 읊은 작품이많다.
아울러 화양동, 박연폭포, 松都, 西京, 百濟古都, 仙遊洞 등 명승고적의 역사와 풍물을 읊은 시에서부터 〈聞倭奇卽題〉, 〈哀乞糧人〉등 변방의 급보와 일반 백성의 질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다. 권말에 8대손 李匡榮이 1890년에 지은 跋과 “庚寅仲春紫陽開刊”이라는 刊記가붙어 있다.